불교강의/불교교리 / / 2022. 12. 18. 17:43

삼법인의 뜻, 의미 / 이것을 이해하면 불교가 쉬워집니다..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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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은 초기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불자님들께서는 대부분 초기불교의 기본 개념의 삼법인에 대해서 잘 접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대승불교권이자 선불교권에서는 깨달음만 강조하고 고(苦)에 대한 직시를 멀리 치부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 요소인 삼법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苦)를 이해해야 불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불교는 타종교와는 다른 시각으로 진리에 접근을 합니다. 물론 해탈, 부처, 견성, 깨달음 등 이런 긍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고통을 직시하는 것이 불교 공부의 첫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자 도덕경에 보면 도가도비상도라고 하여 '도를 도라고 하면 더 이상 참다운 도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듯이 '행복을 어떤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려 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행복이 아닌 것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폭력, 시기, 질투, 이간질, 분노, 악담 이런 것들은 행복과 거리가 먼 것인 것을 알 수 있지요. 따라서 행복이 아닌 것을 자각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행복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입니다.

불교 교리의 시작은 고통(괴로움)

불교 교리의 시작점은 고(苦, 고통)입니다. 우리의 삶이 행복하고 영원할 것 같지만 이 몸도 언젠가는 무너질 때가 있을 것이고, 물질적인 것은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각적이고, 쾌락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 우리에게 생로병사의 고통이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항상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왜 늙고, 병들고,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가? 이런 근원적인 의문에서 출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이 왜 고통입니까? 삶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마세요
불교를 허무주의 관점으로 봤던 니체

예전에 큰 스님과의 면접에서, 왜 출가했냐는 질문에 저는 생사고해의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출가를 했다는 모범답안으로 답변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답변은 부처님 가르침이고 초기불교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이런 답변에 대해서 그 스님께서는 '그렇게 삶을 부정적으로 보지 마세요.' 이러면서 제가 뭔가 삶을 부정적으로 대한다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이렇게 삶을 허무주의식으로 보는 관점이 아니지요. 불교를 공부하다가 불교는 허무주의다 이런 식으로 빠져버리는 니체 같은 철학자들도 종종 있던데 이런 관점은 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허무주의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덧없고 무상하다 단지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허무주의적 태도를 지니는 것은 전혀 불교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이 무상하고 덧없기 때문에 변화하는 덧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이라는 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불교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은 영원하다는 착각이 불필요한 것들에 집착하게 만들고 현재에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지나온 인생을 돌이켜 보면 인연이라는 것도 덧없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이 여자, 이 남자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어떤가요? 그러니 과거에 집착하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한 마음을 가진다면 그런 정신 태도가 오히려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있을 때 잘해!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것은 바로 모든 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현재에 집중하라는 뜻을 담고 있는 불교적인 메시지라고 보고 싶습니다. 부모님에게 '있을 때 잘해야지. 살아 계실 때 잘해야지..' 이렇게 다짐할 때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수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돌아가시겠지요. 그러니까 현재에 집중하고 지금이 행동할 때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무상의 가르침입니다. 바로 후회 없는 삶을 살라고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무주의와는 거리가 멀지요. 부처님은 나유타겁 동안을 쉬지 않고 법문을 하셨다고 합니다. 불교의 대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쉬지 않고 법문을 하신다는데 쉬지 않는다는 것은 허무주의하고 거리가 멉니다.


삼법인(三法印)의 의미 - 무상, 고, 무아

삼법인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 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印)은 도장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변하지 않는 세 가지 진리라고 해서 도장 인자를 씁니다. 도장은 한번 찍으면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뭔가 확실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도장을 찍어놓았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탐진치는 곧 고통의 출발점

불교의 출발점은 고(苦, 고통, 괴로움)이고 그것을 먼저 인식하고 소멸하는 것이 불교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는 다른 말로 번뇌(탐진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고통이 있는데 그러면 왜 고통스러울까? 그것은 무상하고(제행무상), 영원하지 않아(일체개고)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나(무아)라고 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에는 인연(원인과 결과)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고통의 원인을 추적하기 시작하셨고 고통의 근본 원인을 무명이라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무명이 우리가 윤회를 하는 근본 원인인 것입니다. 무명이 있어서 우리가 몸을 받아서 어머니 태에서 태어나게 되는데 육체가 생김으로서 생로병사라는 고통이 생겨난다라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발견하셨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모든 것이 무상하고 덧없다'라고 말씀드렸는데 만약에 누군가 '영원한 것이 있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 실제로 유명한 스님이 불교의 윤회를 힌두교의 윤회에 빗대어서 '그것은 힌두교의 문화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았는데. 힌두교의 윤회는 불교의 윤회와는 다릅니다. 힌두교의 윤회는 '영원한 자아(ātman)가 있어서 윤회한다'라는 관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를 말씀하시면서 기존에 힌두교의 윤회의 관점을 철저하게 부정을 하십니다.

1. 제행무상 - 모든 것은 다 무상하다

사람들이 집착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영원하지 않을 것을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도 영원하지 않고 권력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절대 만족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감각적인 쾌락은 한번 만족하면 또 찾게 되는 것입니다. 감각이나 쾌락은 만족을 모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면 고통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상에 대한 가르침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착각하고 사는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무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처님과 라훌라의 대화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발을 씻기는 라훌라

라훌라야 이 세상의 물질은 무상한가, 영원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에 대해서 이것은 내 거다, 나다, 나 자신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무상한 것에 대해서 자기 것이라고 해봐야 그것은 언젠가는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2. 일체개고 - 영원하지 않은 모든 것은 다 고통이다.

영원하지 못하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관점입니다. 인간의 몸은 생로병사가 있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하고, 따라서 집착할 필요가 없고, 사람과의 인연도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지기 때문에 집착할 필요가 없고, 물질도 영원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돈이 많은 재벌이나 현재 승승장구하는 사람에게 '인생이 고'라고 하면 '인생은 행복한 것이다. 인생이 왜 고인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생을 짧은 소견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상 세계의 하루는 인간 세계의 1,600년과 같다고 합니다. 천상 세계의 천신들이 볼 때 인간의 수명과 인생은 굉장히 덧없게 보일 것입니다. 천상에서 몇 분 정도 보내면 이미 인간들은 태어나고 죽는 시간이지요. 그들이 볼 때 인간들의 삶이란 굉장히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은 굉장히 길게 보기 때문에 생로병사가 항상 우리의 그림자 뒤에 숨어 있어도 잘 인식이 안 될 뿐이지 인생이 굉장히 짧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벌이나 권력자라고 하더라도 생로병사의 고통에 직면하는 순간은 반드시 도래하게 됩니다.

3. 제법무아 - 고정불변한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많은 분들이 생각이나 감정은 나라고 믿는 부분이 많습니다. 감정이나 생각이 나라고 믿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성인들은 실제로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고 알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범부중생은 곧잘 화를 내는데요. 이것은 화를 낼 때의 감정과 그 생각이 나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화를 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을까요? 그래서 성인인지 아닌지 분간을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화를 내는지 안 내는지를 보면 매우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가리왕이 사지를 잘랐을 때도 오히려 화를 내지 않고 내가 부처가 되면 당신을 제일 먼저 제도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후에 가리왕은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아라한이 되는데요. 교진여의 전신이 가리왕입니다. 생각은 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아지랑이 같은 것이니 전혀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제법무아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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