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 / 2025. 1. 11. 16:21

유교는 언제부터 종교가 아니게 되었을까요?

반응형

유교의 종교적 자격 박탈과 변천.. 일제강점기의 유교 비종교화 과정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제강점기 시기에 유교가 종교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점차 학문과 제사, 도덕의 영역으로 축소되어 갔던 과정을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발전과 함께 유교의 변화를 함께 살펴보는 것은 우리 역사와 정신문화의 한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겠지요.

 

유교의 제사와 학문으로서의 이동

1910년 8월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이를 ‘종교 해방’이라는 명목으로 포장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불교와 기독교는 공식적인 포교가 가능해졌습니다. 반면, 유교는 종교로서의 자격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지요. 1911년에는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개편되었고, 이는 유교가 일본의 국가신도와 유사하게 종교가 아닌 제사와 학문의 영역으로 추방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1915년에는 ‘포교규칙’이 시행되면서 유교는 종교로서의 자격을 공식적으로 박탈당했습니다. 불교나 기독교처럼 신앙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못하고, 학문적, 도덕적 역할에 한정된 것입니다. 이로써 유교는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근대화 속에서 종교로서의 정체성을 점차 잃어갔습니다.

 

서당 감소와 유교의 축소

유교는 전통적으로 한문 교육에 기반을 둔 종교였습니다. 하지만 1911년 ‘조선교육령’ 시행 이후, 유교 교육의 중심이었던 서당이 본격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당규칙이 공포된 1918년 이후로는 서당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이는 유교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서당 교육의 축소는 곧 유교적 가치와 교육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지요.

 

의례의 변화와 유교의 비종교화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의례준칙’을 공포하여 유교적 의례를 대폭 간소화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길게 유지되던 상복 기간이 대폭 줄어들었고, 제례는 부모와 조부모로 국한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유교가 더 이상 삶과 죽음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종교로 기능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대신 단순한 의례나 전통으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유교의 비종교화는 어떤 것을 의미할까

조선시대 유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닌, 사람들의 일상과 철학을 관통하는 거대한 문화 체계였습니다. 그렇기에 유교의 비종교화는 단순히 종교의 자격을 잃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지요. 이 과정은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여러 제도적 변화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유교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서, 여러분께서는 한 시대를 지탱했던 정신적 토대가 어떻게 변모했는지 생각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변화가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 고민해 보는 시간도 되었으면 합니다.

반응형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