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스님은 한국 선불교에 선풍을 진작시킨 인물로 기행으로 유명합니다. 근현대 고승들은 현대판 스님과 달리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이 있는데요. 경허스님만큼 특이하고 재미있는 일화를 가지고 있는 스님도 참 드뭅니다. 실화이지만 마치 전설을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경허스님과 같이 기행을 일삼는 스님이 있었는데요.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한 춘성스님입니다. 춘성스님은 육영수 여사 앞에서도 막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경허스님 생애
경허스님의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 속명은 박동욱(東旭)이었습니다. 9세 때에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청계사에 출가했는데요. 말년에는 이름을 박난주로 개명하고 자신의 원래 신분을 감춘 채로 환속하여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64세(1912년)에 함경남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효대사와 환속한 것은 비슷하지만 경허스님은 말년에는 큰스님으로서의 권위를 벗어던지고 민중속에서 조용히 살다가 떠나는 삶을 선택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입적하시기 전에 일원상을 그리시며 써놓은 열반송
心月孤圓 (심월고원)
마음 달이 홀로 둥그니
光呑萬像 (광탄만상)
그 빛이 만 가지 형상을 삼켰도다.
光境俱忘 (광경구망)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復是何物 (부시하물)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경허스님은 10대에 이미 한문 문리가 트고 23세의 젊은 나이로 동학사에서 화엄경을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31세까지 강의를 하던 경허스님은 환속한 은사 계허스님을 만나기 위해서 서울로 길을 떠나게 되는데요. 길을 가는 중에 천안의 어느 마을에서 사람들이 끔찍한 역병에 걸린 것을 보고 경허스님은 학문을 아무리 배워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경허스님은 하던 강사일을 포기하고 은사스님을 만나러 가는 일을 단념합니다.
콧구멍 없는 소라는 문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스님은 학문이 죽음 앞에서는 자유자재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을 하고 선수행에 몰입을 하게 됩니다. 3개월간의 목숨을 걸고 한 폐관수행의 결과 스님께서는 어떤 사미승이 콧구멍 없는 소라는 글귀를 듣고는 문득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때가 스님의 나이로 31세였습니다.
경허스님 오도송 -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忽聞人語無鼻孔 (홀문인어무비공)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頓覺三千是我家 (돈각삼천시아가)
문득 깨달아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다 나의 집일세
六月燕岩山下路 (유월연암산하로)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野人無事太平歌 (야인무사태평가)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시냇물에서 여인을 만난 일화
경허스님이 어느 날 만공스님과 시냇물을 지나갈 때였습니다. 한 여인이 옷 때문에 냇가를 건너가지 못하고 있을 때였는데요. 여인이 스님에게 품삯을 드릴 테니 나를 업어서 강을 건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이 여인을 업는 것은 신체접촉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계율에 어긋나고 스님의 위의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인 만공스님은 '어찌 출가한 스님이 젊은 여인을 업을 수 있냐?'며 만류하였지만 경허스님은 여자의 청을 들어주어 여인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넙니다. 강을 무사히 건너자 여인을 안도하며 약조하였는 품삯을 건넵니다.
스님 여기 약조한 두 푼입니다
여자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형식적으로 돈 먼저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여인의 태도가 못마땅하였는지 돈은 필요 없고 다른 것을 달라며 젊은 여인의 엉덩이를 손으로 찰싹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어린 제자 만공스님은 화들짝 놀라서 '스님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이에 스님께서는 '재물이면 뭐든지 다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버릇을 고쳐줘야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공스님은 처소에 들어와서도 스님이 여자의 엉덩이를 때린 모습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어떻게 스님이 젊은 여인의 엉덩이를 때릴 수가 있을까? 만공스님은 의문이 풀리지 않아 잠을 청할 수 없었고 경허스님에게 다시 질문했습니다.
"스님 출가 사문은 여자를 멀리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어째서 오늘 낮에는 젊은 여자를 등에 업었을 뿐만 아니라 여자의 엉덩이까지 철썩 때릴 수 있습니까?"
경허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 여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여자를 등에 업고 있느냐?”
나는 이미 그 여자를 개울가에 놓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그 여자를 마음속에 품고 있구나. 내가 너에게 여자가 이쁘다 못생겼다 이런 분별심을 내지 말라고 가르쳤지 않느냐? 내가 만일 60이 넘은 할머니를 개울가에서 업고 왔다면 네가 지금까지 마음속에 품고 잠을 청하지 못할 수 있겠느냐?
경허스님은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며 옛 어른의 법문을 소개합니다.
재물을 보되 분별심을 가지지 말 것이며 겉모양이나 겉소리에 눈이 흐리거나 귀가 어두워지면 쓸데없는 집착에 빠지게 되나니, 집착에 빠지게 되면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가지고 싶고 때로는 보기 싫어지고 미워하고 버리고 싶어 지니, 이것이 바로 번뇌의 원인이 되느니라.
경허스님에 대한 평가는? 무애행 vs 파계
경허스님은 한국 선불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긴 하나 깨달음을 얻은 뒤에 음주와 여색을 즐긴 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에 대해 초계율적인 무애행이다라는 의견과 파계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선사들의 계율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후학들의 모방심리가 있기 때문에 승려들의 청정계율을 수지하는 데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은 고의로 계행을 파하지 않는다
초기불교의 관점으로 볼 때 성인 4과 중에서 가장 낮은 단계인 수다원의 경지에만 이르러도 고의로 계율을 파하는 것은 없으며 영원히 청정계율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다원의 경지부터는 영원토록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신앙을 목숨과도 맞바꾸지 않습니다. 이런 초기불교의 관점으로 보면 한국 선사들의 깨달음이라는 것을 과연 신뢰할만한 것이냐는 물음표를 던져볼 수 있습니다. 막행막식, 기행은 난센스가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남진제 북송담은 경허선사의 법맥
선불교에는 깨달음을 얻으면 스승이 인가를 해주는 문화가 있습니다. 성철스님은 깨달음을 얻고 난 후로 제방의 선사들이 인가를 너무 싶게 해주는 것 같아서 실망하고 셀프인가를 한 경우입니다. 현재 남진제 북송담이라고 해서 남쪽에는 진제선사, 북쪽에는 송담스님이 경허스님의 법맥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 4대 생불로 알려졌던 숭산스님도 경허스님 계열의 전법게를 받은 선사입니다. 이런 전법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런 스님들이 고승인 것은 확실하나 그 전법게를 과연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고승들께서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중국으로 건너가서 허운대사(1840~1959)에게 인가를 받았어야 더 공신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하는 스님들도 있습니다. 당대 허운대사께서 살아계셨을 당시 중국과 선불교를 교류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육조 혜능이 근본적인 선불교의 조상
한국 선불교 조상은 경허스님이지만 가장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육조 혜능대사가 선불교의 근본스승입니다. 선불교는 한국 불교가 발전하게 되는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것을 사실이긴 하지만 선불교의 견성이나 깨달음의 경지를 부처님의 경지와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무리가 있는 발상입니다.
경허스님이 출현한 뒤로 한국 불교에 많은 수월, 만공, 혜월, 한암 같은 많은 도인이 배출되어 지금까지도 한국 선불교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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