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의 행복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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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독일 태생이다. 현대 철학자들 중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이자 비판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대표적이다. 아도르노는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보단 고통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는데, 행복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통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정적인 접근인데 부정적인 접근이 중요한 이유는 부정을 알면 긍정은 저절로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누구보다 엄격하게 비판적으로 20세기 사회를 통찰하였으며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사유했다.

 

아도르노의 생애

아도르노는 1903년 독일의 유대계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포도주 상인인 부친가 성악가 모친을 두었는데 모친과 이모의 각별한 관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도르노는 1931년 교수자격논문 취득을 하였지만 유대인 부친을 두었다는 이유로 독일에서 쫓겨난 뒤에 영국으로 건너간 뒤에 미국으로 건너간다. 나치가 패망한 뒤 1949년에는 다시 독일로 돌아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철학, 사회학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1960년대 중반에 정치적 혁명을 열망하는 학생운동이 활기를 띠었는데, 학생들은 아도르노 교수가 자신들의 운동을 지지해 줄 것을 원했지만 아도르노는 학생들과 거리를 두었다. 이것에 반감을 품은 학생들은 교수의 연구소를 급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도르노는 1961년 스위스의 휴양지 체르마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도르노의 행복론

아도르노의 행복론은 기발하면서도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행복론이라고 하면 행복이란 어떤 것이며,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 방법론을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행복론은 기존의 행복론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다. ‘행복이 무엇이다라고 딱 집어서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아도르노는 현재 자신의 불행을 행복의 출발점으로 삶는다. 현재 누군가가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스스로를 기만한 것이거나 타인의 행복을 편취한 것이다.

 

아도르노는 행복을 위해서 또 다른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그것을 아도르노가 볼 때에는 또 다른 전체주의를 출현시키는 악순환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는 현재 처한 상황에서 주도면밀하게 자신을 비판해야 하고 부분적으로 극복하여 행복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행복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불행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그가 신앙을 가졌던 종교적인 영향이 크다고 생각된다. 유대교에서는 기독교와 달리 신을 형상화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한다. 신은 자연을 초월한 영원무변한 절대적인 존재인데 그것을 한낱 그림으로 나타낸다면 자연과 동일한 차원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형상화는 신에 대한 왜곡이라고 여기는 것이 유대교의 교리이다.

 

아도르노는 왜 우리가 불행하다고 단언을 했을까. 그것은 그가 그 당시 처했던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린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쫓겨났었고, 히틀러 정권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겪었던 것은 인간성 타락의 경험이었고 당연히 비관주의 속에서 세상을 보았을 것이다.

 

아도르노는 행복이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그것은 왜곡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행복하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개인의 판단이나 인식에 해당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왜곡이 될 수 있다. 또한 행복의 객관적이라는 차원에서 보았을 때도 누구나 다 인정할 만한 행복이라고 해도 그 상태가 정확히 어떤 정도인지 결정하기 어렵고 철학자마다 다른 답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행하게 만드는 조건은 대표적으로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도구적 이성, 둘째, 자연에 대한 지배, 셋째,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행복한 삶일까? 그것은 그의 저서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주어지는 행복, 부단한 생산의 명령으로부터 해방된 삶에서 오는 자유, 타자와의 화해로운 공존,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연대의 회복 등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아도르노가 제시한 것은

아도르노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현재의 불행에 대한 면밀하고 철저한 비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먼저 원인과 조건을 진단하여 우리는 행복한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한 행복한 삶이란 지배 없는 삶과 같은 뜻이다. 인간들과의 관계 또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일방적이거나 억압이 없는 삶이 그가 원했던 삶이다.

 


아도르노의 행복론 철학을 접하면서 친근하게 다가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칸트 철학 처럼 어렵지 않으면서 자신을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 같았다.

 

외부적인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행복하면 뭘 생각할까? 매월 얼마의 소득, 그리고 내 소유의 아파트 등등 세속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을까?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고 나면 사람들은 많은 이성과의 교제에 욕심을 낼 수도 있고 명예를 탐할 수도 있다. 이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에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결국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며 외부적인 요인인 것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어제 사 놓았던 주식이 하루아침에 주가가 폭락하여 반토막이 날 수도 있는 것이고 아파트값이 폭락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외부적인 가치에 기인하며 행복을 찾기를 시작하면 그것은 언제나 외부적인 요인에 좌우되어 우리는 행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불행을 이해해야 행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도르노는 행복을 불행에서부터 시작하라고 말한다. 부처님도 행복은 탐진치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도르노의 말도 그것과 비슷하게 다가왔다. 고통스럽지 않고 불행하지 않은 것이 행복한 것이다. 행복이 무언지 잘 모르겠지만 불행이 무엇인지는 정확이 우리는 알 수 있다. 근심, 걱정, 기아, 배고픔, 전쟁, 폭력, 질병, 싸움, . 이런 단어를 듣기만 해도 어떤가? 기분이 다운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는 불행을 이해할 때 행복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미지의 것을 알기 위해서는 기지의 것을 명확하기 이해하여야 하고 매일매일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많이 노력을 하다 보면 저절로 올바른 위치에 있게 된다. 매일매일 그날 하루가 내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면 어느새 바른 위치에 서있을 것이다.

 

2022.08.19 - [불교/인문역사철학] - 스피노자는 행복을 이렇게 생각했다 - 스피노자의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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