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강의/불교교리 / / 2022. 11. 24. 20:28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 삼독의 뜻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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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탐진치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탐진치 삼독이라고도 부르는데요.

탐은 탐욕(貪慾), 진은 진에(嗔恚), 치는 우치(愚癡)라고 합니다. 탐욕은 말 그대로 탐욕이고 진에는 성내는 마음, 분노, 시기, 질투, 혐오를 뜻합니다. 무언가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는 마음도 싫어하는 마음에 해당되므로 진에에 속하게 됩니다. 치는 어리석음을 뜻하는데요. 수행의 경지가 상당히 높은 경지에 올라가서 탐욕과 성내는 마음이 제거되더라도 어리석음/무명은 가장 늦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 목적이 탐진치 삼독 번뇌를 제거하기 위함인데요. 번뇌의 종류를 크게 탐진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탐욕(貪慾)

탐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가령 누구를 좋아해서 하루 종일 그 사람만 생각이 난다고 가정해봅시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결혼을 하는 것은 낭만적이지 않나요?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오로지 결혼이 인생 목표인 젊은이들이 많았죠. 모든 드라마와 영화가 사랑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으로 볼 때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자체도 하나의 번뇌로 봅니다. 그래서 불교를 출세간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런 가르침은 불교에만 있습니다. 재가수행자들을 위해서 초기경전에 남편의 도리, 아내의 도리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올바른 부부생활과 자식의 도리에 대해서도 말씀을 해주시지만, 출가수행자가 되어 궁극인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성 간의 사랑이나 성욕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원각경에 보면 사랑을 포기하고 버려야만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반 중생들이 알고 있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그것을 버리고 포기해야만 진정한 사랑이 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이 탐욕을 엄청나게 사랑합니다.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끔찍하게 생각하지요. 그래서 몸에 좋다고만 하면 물불을 안 가리고 좋은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황금이 소나기처럼 쏟아질지라도 사람의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사람의 욕망이란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습니다. 채우면 그 당시에는 만족을 하는 것 같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또 원하게 됩니다. 끊임없는 갈증이 있습니다. 마치 소금을 먹으면 끊임없이 갈증이나 나고 목이 마른 것처럼 말이죠. 욕망이라는 것에 의존한 채로 살게 되면 참으로 불편합니다. 이게 한번 채운 상태로 유지를 해주면 좋은데 유지가 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채워줘도 만족을 모르고 끊임없이 채워줘야 해서 엄청 불편합니다. 왜? 모든 욕망을 채워지지 않을까요? 본래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채워야 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항아리에는 물을 가득 채우면 더 이상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바탕은 허공과 같고 실체가 없기 때문에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항아리처럼 채울 수 있으면 얼마나 편리할까요?

2. 진심(嗔心)

두 번째, 탐진치 중에서 진심에 대해서 이야기해봅니다. 제 주변에도 화를 잘 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있는데요. 화를 내고 곧 후회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이게 잘 해결이 되지 않아 항상 고민인가 봅니다.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나'가 있고 '너'가 있다는 생각에 기인한 것입니다. 어떤 자아가 있어서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치심/어리석음이지요. 여러분이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에 의해서 손해도 보고 상처도 입고 기분이 나쁜 경험을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가 나는 그 순간 화가 나는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의 감정, 그 생각이 나라고 믿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생각은 나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많은 불자님들이 나라고 하는 자아가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거, 내 거 구분하고 화를 내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은 일단 화를 내지 않습니다. 금강경 한 두 번쯤은 읽어보셨을 텐데요. 거기서 부처님이 전생에 가리왕에게 사지가 찢겨 나가는 대목이 있는데요. 거기서도 부처님은 화를 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리왕에게 내가 부처가 되면 당신을 가장 먼저 제도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팔다리를 잘랐던 가리왕이 부처님의 제자 교진여입니다. 교진여는 녹야원에서 부처님의 첫 설법을 듣고 아라한이 된 제자입니다.

예전에 어떤 스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스님께서는 나는 탐진치 중에서 탐과 치는 모르겠지만 진은 극복한 줄 알았다고 말씀하시더니... 스님 생활을 해보니 그것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스님 생활하면서 대중들과 부딪히면서 화를 내는 자신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화내는 마음도 극복하기 어려운 번뇌 중에 하나입니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과 어울릴 때는 매우 부드럽고 차분하지만 나에게 불쾌한 말을 했을 때 그가 화를 낸다면 그 사람은 아직 화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3. 치심(癡心)

마지막으로 치심입니다. 치심은 가장 어렵습니다. 성인들도 가장 높은 단계인 아라한이 되어서야만 완전히 치심이 떨어집니다. 치심은 근본적인 어리석음(무명)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어떤 나라는 실체가 있어서 그것을 나라고 믿는 마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나'가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삽니다. '너'가 있고 '내'가 있다고 철썩 같이 믿기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손해 보거나 피해본다는 느낌이 들면 화도 내고 억울해합니다. 성인이 화를 내거나 억울해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까요? 단지 원래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수행해서 '나'라는 것이 없다고 깨치게 되면 화를 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수행자가 높은 경지에 올라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서 화를 내거나 욕심을 내거나 하면 그 경지는 거짓이라고 보면 됩니다. 자신의 수행의 경지를 과장하거나 속이는 이유는 그것이 시주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지요.


탐진치 삼독 번뇌 중에서 치심이 가장 근본적인 바탕이고 번뇌의 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의 단계인 수다원에 이르러서도 치심이 완전하게 떨어지지 않고 아라한에 단계에 이르러서야 무명이 완전히 떨어져 나갑니다.

탐진치 이 세 가지 번뇌가 우리를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근본 원인이지만 중생들은 그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탐진치를 매우 사랑하지요. 욕망을 매우 사랑하기에 먹망이나 자극적인 소재의 영화나 드라마가 인기가 있고.. 어떤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화를 내고 시기, 질투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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