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시대의 서울의 모습 / 경술국치 1910년 나라를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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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경술년 829일에 대한민국은 일본 제국에 병합이 되는 치욕을 겪게 된다. 경술년에 벌어진 치욕이라고 하여 경술국치라고도 부른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게 된다.

한양의 명칭은 일제의 의해 경성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서울의 공식 명칭은 한성이었으나 불리기가 딱딱하다 하여 사람들은 한양이라고 즐겨 불렀다. 우리에게도 서울은 한양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한양은 일본에 강제병합이 되면서 명칭이 경성으로 바뀌고 조선의 수도가 아닌 경기도의 경성부로 격하되면서 위상이 추락되었다. 한양의 공식 명칭인 한성부는 대한제국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일본 제국의 한 지방도시로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위압감을 주기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다

일제는 경성을 식민지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다. 일제는 건물을 지을 때도 조선인들에게 위압적으로 보이려고 노력을 했다. 앞이 탁 트인 곳에 건축을 했으며, 그 건축물들은 18세기 서양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따서 만들었다. 경성에 이렇게 지은 건물의 예로는 조선은행, 경성우체국, 경성부청, 조선총독부 청사를 꼽을 수 있다. 조선의 식민통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건물 중에 대표적인 건물을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이 건물은 독일인이 설계를 했지만, 그가 죽고 일본인이 마무리를 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1916년 착공이 되어서 완공을 하는데 10년이 걸렸고 많은 논란 끝에 1995년 철거되었다.. 총독부를 철거해야 된다는 주장은 과거 이승만 정권부터 나왔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보류되고, 노태우 대통령도 지시를 했지만 무산이 되었다.

 

문민정부 출범하자 드디어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고 주장했던 김영삼이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지시했고, 이 건물은 마침내 1995815일 광복절에 철거가 되었다. 그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본인의 서울관광코스 중에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철거가 결정이 나자 평소보다 더 많은 일본인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보러 왔고, 일부 일본인들은 으스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면서 애석해하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일제는 조선인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서 조선총독부 청사가 완공이 되자 거기에서 관병식을 했다. 이것은 식민지 민중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퍼레이드였던 것이다.

철거 전과 후

의도적으로 조선총독부를 지어 경복궁의 시야를 가렸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점령한 뒤에 경성부를 개발을 했는데, 이 개발은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 맞추어서 새로운 전차노선을 만들거나 시구개수사업을 진행했다.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을 위주로 하며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일제가 건물을 짓는 방식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일부러 광화문이 있는 자리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워 경복궁의 시야를 가리게 했다. 이것은 나라가 망한 모습을 직접 보게 하려는 시도였다. 1940년대에는 근대적 건물이 많이 들어왔다.. 백화점, 호텔 같은 건물들이 들어와 예전의 한양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 되었는데 일제의 근대적인 건물과 한양의 오두막집이 민족적, 사회적 불평등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조선신궁을 스스로 해체한 일본

또 일본 식민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를 들면 신사이다. 신사는 일본 여행을 가면 손쉽게 볼 수 있다. 신사는 일본의 신토신앙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종교시설이다. 일제는 1925년에 남산의 중턱을 깎아서 조선신궁을 건립을 했다. 해방직후 전국의 지어졌던 일본의 많은 신사들은 한국인들에 의해서 불타져 사라졌는데 조선신궁만은 일본인 스스로 해체작업을 해서 없어졌다. 지금의 조선신궁의 자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지금은 남산공원이 조성되고 일제침략에 맞선 독립군인 안중군의사의 기념관이 건립이 되었다. 옛 조선신궁터에 안중군의사의 기념관은 대한민국의 긍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여겨진다.

 

일제가 서울을 차지하고 경성부의 인구는 약 두 배 가까이 이상 늘어났다. 여기에서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35년에 약 28%를 차지했다고 한다. 일본인의 직업은 대체로 대소상공인이나 관리, 기업가가 차지한 반면에 조선인은 몇몇 지주를 빼놓고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이 때, 거의 대부분의 좋은 토지는 일본인들의 소유였고 반 이상이 일본인의 땅이었다. 그 당시 동아일보를 보면 촌토 빼고는 거의 일본인들의 소유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이 나뉘었다

일제강점기 때에 서울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북촌은 조선인 남촌은 일본인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북촌은 지금의 종로, 남촌은 지금의 명동, 충무로를 생각하면 된다. 일제는 남촌을 발달시키기 시작했는데 전차노선도 남촌구역에 많이 발달을 시켜나갔다. 조선은행 앞 광장을 중심으로 상업, 문화, 정치, 행정이 발달했다.

북촌은 장군의 아들 영화에서 봐서도 알 수 있듯이 종로가 배경이다. 이 종로지역은 거의 조선인들이 거주를 하고 있었고 명동, 충무로는 일본인의 거주지였다. 일제는 종로를 차별했다. 남촌은 길이 잘 닦여 있는 반면에 종로는 길이 좋지 않았다. 길 뿐만 아니라 하수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오물냄새와 악취가 심하게 풍겨져 나왔다.

 

총독부 청사가 북촌에 들어온 것을 시점으로 일본인들도 점차 북촌에 거주를 하고 거기에서 상업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에 북촌에 있는 조선인들의 상권은 밀려나고 바깥으로 밀려나 빈민촌을 이루게 되었다. 그 당시 경성은 식민지 지배층의 호사스러움과 피지배층의 빈곤이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남촌은 근대적인 건물과 지배층의 호사스러움으로 치장하여 마치 작은 도쿄를 연상하게 했다. 그렇지만 도심과 달리 경성부 외곽지역은 그 당시 거의 문명적인 혜택을 받지 못했는데 해가 지면 어두워서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경성부는 지역 분화의 현상이 생겼다. 정치중심지역은 조선총독부가 있는 북촌, 경제중심지역은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고 조선은행이 있는 남촌이었다. 그리고 군사행정중심지역은 용산이었는데, 이 지역은 일본의 군사지역이자 일본의 식민지 기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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